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캘러헌 (문단 편집) === 각료 활동 === 세관으로의 경험을 가졌던 덕인지, 1947년 캘러헌은 애틀리 총리에 의하여 교통수송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오늘날과 같이 검은 아스팔트 위에 하얀색으로 표시된 [[횡단보도]]를 도입한 것이 교통부 장관으로 캘러헌이 남긴 업적. 이후 잠깐 동안 [[유럽의회]]에 영국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1951년 애틀리가 실각함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윈스턴 처칠]] - [[앤서니 이든]] - [[해럴드 맥밀런]]으로 이어지는 13년 동안의 보수당 집권 시기에 캘러헌은 노동당의 [[그림자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해럴드 윌슨]]과 함께 노동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1963년 [[휴 게이츠컬]] 당수의 사망으로 인해 열린 [[1963년 영국 노동당 지도부 선거]]에 출마했지만 [[해럴드 윌슨]]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1964년에 다시 노동당이 집권하고 해럴드 윌슨이 총리직에 오름에 따라 캘러헌에게는 재무부 장관이라는 요직이 주어진다. 이 시기 영국 경제는 높은 실업률, 높은 인플레이션, 높은 무역 적자 등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캘러헌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한편으로 파운드 화의 [[평가 절하]]를 단행한다. 그렇지만 평가 절하로 인하여 통화량이 증가하고 이로 인해 예산 위기가 발생하자, 캘러헌은 [[법인세]]를 도입하고[* 그 전까진 기업들도 개인 납세자에게 부과되는 것과 동일한 세율로 이익에 대해 소득세를 부과 받았다.], [[소득세]]와 [[유류세]]를 인상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에 직격탄을 맞은 계층은 바로 노동당의 지지계층이었던 노동자층과 서민층이었다. 이들이 들고 일어난 끝에 결국 정부는 소득세 인상분을 반환할 것을 약속해야만 했다(...)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캘러헌은 윌슨 총리와 협의 하에 적극적인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EEC|EU]]에 가입하고자 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긴축재정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대응한데다가, EEC 가입 문제는 [[샤를 드 골]]에 의하여 비토당했던 것.[* 드 골은 영국을 미국의 하수인, 트로이 목마 정도로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영국이 EEC에 가입하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프랑스가 [[브렉시트]]하지 말라고 빌고 있는 판국~~]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67년에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유가가 폭등해버린다. 결국 캘러헌은 다시 한 번 평가 절하를 단행했고 이는 엄청난 논란을 야기한다.[* 특히나 캘러헌이 평가 절하 직전에 '이번엔 진짜로 평가 절하 없어요'라고 언론에다가 말해놓고는 이를 뒤집은 거여서 문제가 더더욱 커졌다.] 결국 평가 절하를 단행한 직후 캘러헌은 재무부 장관에서 사임하고 만다. 사임 직후 내무부 장관으로 재발탁된[* 정확히 말하자면 재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이 서로 자리를 스위칭했다.] 캘러헌은 [[IRA]]의 무장테러에 대응하여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 파견을 지시한다. 또한 1968년 영국 내에서 인종에 근거한 취업, 교육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내무부 장관으로 캘러헌이 남긴 업적. 하지만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에게 ~~두 석 차이로~~ 패배함에 따라 캘러헌은 내무부 장관에서도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1974년 다시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캘러헌은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1975년 영국의 [[유럽 연합]] 가입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